4.19 혁명 발단 이유 과정 결과 의의 이승만 하야
4.19 혁명은 대한민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들고일어난 혁명입니다. 국제적으로 아시아에서 드물게 성공한 민주 혁명으로 평가되는 4.19 혁명의 발단 이유, 과정, 결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4.19 혁명 발단 이유
1960년 4월에는 민주주의 시민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2.28 학생민주의거와 3.15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가 4.19 혁명의 서막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일어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
1950년대 언론인들은 최대 지식인 계층에 속했습니다. 대부분의 논조는 이승만 정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몹시 강했습니다.
이런 언론에 대한 탄압, 테러 행위, 날조 및 공작행위는 곪을 대로 곪았고, 이들 언론을 구독하는 국민들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교육정책으로 인한 높은 교육 수준
이승만은 국방비 다음으로 교육비에 많이 투자를 해 1945년 대비 대학생이 12배나 증가해 동시기에 영국보다 높은 대학입학률을 보였습니다. 당시 1 공의 최우선 목표 중 하나가 문맹 퇴치와 학생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일반 상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이승만의 독재를 두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볼 순 없었습니다. 이승만은 자신을 타도하는 자산을 본인이 키운 셈이 된 것입니다.
심각한 청년 실업 문제
고등 교육을 받은 대학생조차 일하기 힘들었던 실업률이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2명에 1명 꼴로 일을 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사회 전반과 전 세대에 거쳐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습니다.
3월 15일 부정선거
3월 15일 이루어진 정부통령선거는 말도 안되는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일어났습니다. 선거 당시에 발생한 폭력과 부정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경찰과 정부당국은 선거 전에 투표함에 30~40%의 투표지를 미리 넣어놓았습니다. 물론 투표지에는 이승만과 이기붕으로 기표된 표였습니다. 대리투표는 기본이었고, 3인조나 5인조로 묶어 투표를 시켰으며 어이없게도 자유당 지지자인 조장에게 투표지를 확인받고 투표를 해야 했습니다.
선거 결과는 당연하게도 이승만과 이기붕의 압승이었고, 양 후보 득표율이 90%를 넘은 나머지 당황한 정부가 임의로 득표율을 낮추어 발표했습니다. 기록은 이승만 88.7% 이기붕 79%
어이없는 상황에 투표권을 우롱당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투표 당일인 1960년 3월 15일 오후 12시 45분에 광주 금남로에서 최초로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곡 민주주의 장송'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마산에서는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버리자 미리 기표해 둔 용지가 우르르 쏟아지며 부정선거가 적발이 되었고, '선거 포기'를 선언하며 폭발한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때 경찰의 집단 발포로 김주열 열사를 포함해 9명이 사망하고,80여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며 제2차 마산 의거의 도화선이 되어 4.11 의거는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4.19 혁명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4.19 혁명의 시작과 과정
4.11 의거에서의 김주열 열사의 사망을 조사한 결과 당시 최루탄은 "군중을 향해 쏘지 말 것"이라는 설명까지 적혀 있었고, 벽까지 뚫을 수 있는 고성능 최루탄이었습니다. 원래 최루탄은 군중을 향해 쏘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터뜨려 최루가스로 시위대를 분산시키는 용도였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경찰이 대놓고 직격으로 최루탄을 발사했습니다. 당시 시신의 참혹한 몰골을 본 시민들은 분노가 폭발했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살인선거 물리치자" 며 시가행진을 시작했습니다.
4월 19일 화요일, 피의 화요일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그날의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특히 대학생들도 들고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중 부산과 광주에서는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4월 19일 시위 동안 100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정부는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혁명적 시위에 당황해 이 날 오후 4시 30분에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4.19 혁명 주도한 학생들의 힘
4.19 혁명을 주도한 것은 학생들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서울시내 소재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왔고, 청년들의 의기는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3.15 부정선거 후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르면서 가장 분개한 사람들은 같은 나이 또래인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이들이 시위에 먼저 나섰고 열성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4.19 당일 오전부터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거기에 거의 때를 같이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들이 종로로 진출했습니다. 이어 9시경에는 법대, 약대, 수의대, 치대 등 거의 모든 단과대학이 합류했습니다.
다소 늦게 합류한 의대생들은 흰 의사 가운을 입고 시위에 참여했고, 경무대 앞에서 총격 사건 발생 후 서울대학교병원과 연락해 의료장비와 앰뷸런스 지원을 받아 환자 치료에 힘쓰기도 하였습니다.
4월 26일 화요일, 승리의 화요일
4.19 혁명이 일주일이 지난 4.26의 상황은 이승만에게 명백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26일 아침 김정렬 국방부장관이 강경하게 이대통령에게 하야를 진언했습니다.
10시 20분경 드디어 이승만이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해 사임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시민들은 방송을 듣고 경무대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승리를 환호하였습니다. 시민들은 새로이 "질서를 지킵시다" 플래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했으며 길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4.19 혁명의 의의
4월 19일의 혁명을 어느 역사학자는 프랑스혁명에 비유하였으며 어느 경제학자는 국가 독점 자본주의를 해체한 민주적 혁명으로 평가하였습니다.
4.19는 실제 한국 역사에서 일반 대중이 봉기하여 정권을 쓰러뜨린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4.19는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승화되었습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있고, 4.19 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첫 승리였고, 근현대사에서 처음으로 직접 정권을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8.15 광복이 '첫 번째 해방'이었다면, 4월 혁명은 '두 번째 해방'이었다고 어느 역사학자들은 언급하였습니다.
지금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은 우리 선조의 피로 만들어진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4.19 혁명을 잊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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